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둠의 심연 (문단 편집) === 작가 콘래드의 인생의 영향 === [[파일:Joseph-Conrad.png|width=30%]]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데에는 그의 인생과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콘래드, 본명 유제프 테오도르 콘라트 코제니오프스키(Józef Teodor Konrad Korzeniowski)는 [[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우크라이나 베르디치우(Бердичів)에서 [[폴란드인|폴란드계]] [[귀족]]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르디치우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서 서쪽으로 180km가량 떨어진 도시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전성기 시절부터 서우크라이나의 금융 및 무역 중심지로 발달한 도시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민족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시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사람들은 금융에 종사한 [[유대인]]들이었다. 폴란드가 망하고 러시아가 점령한 이후에는 새로이 [[오데사]]가 서부 우크라이나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서서히 쇠락했다. 이후로는 현재의 [[하레디|하레디파]]로 이어지는 하시딤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여 현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류이다. 그의 부모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였고, 아버지 아폴로 코제뇹스키는 그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반러시아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러시아 경찰]] 당국에 체포되어 아내와 함께 북러시아의 볼로그다로 유배보내졌다. 그의 어머니는 유배 중에 죽었고, 아버지 또한 유배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이후로 그는 외삼촌의 후원을 받으며 살았다. 몸이 안 좋아서 개인 지도를 받으며 홀로 선원의 꿈을 키운 그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불행한 어린 시절과 허약한 체질 때문에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었다. 비록 부유한 외삼촌 덕에 재정파탄 위기에선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정치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러시아군]]에 의무적으로 '''25년간''' 복무해야 하자 망명을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영어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영국으로 망명한다. 콘래드에게 영어는 제3외국어였다. 이런 조건에서 문학사에 남는 영어소설을 다수 썼다는 것이 그저 다만 외국어의 한계 때문이지 대부분의 소설의 분량이 좀 짧고, 그가 집필한 장편소설은 거의 전무하다. 또한 조셉 콘라드가 원어민처럼 흠결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다. 폴란드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으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프랑글레와 포글리시같은 [[브로큰 잉글리쉬]]를 구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콘래드는 영국으로 망명한 후 [[영국 해군]] 복무를 거쳐 식민지 교역선 선원 생활을 시작한다. 영어는 영국인 선원들에게서 배웠고, [[낭만주의]] 영국 시인들의 작품과 신문을 읽으며 그 수준을 높여 갔다. 그는 교역선 선원으로 전 세계를 들쑤시고 다녔는데, 1890년에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 자유국]]의 콩고 강 상류 지역 무역을 독점한 '무명 벨기에회'에 고용되어 콩고로 파견된다. 이 회사는 바로 콩고 전체를 '''사유지'''로 가지고 악질적으로 지배하던 벨기에 국~~대마~~왕 [[레오폴드 2세]]의 회사이다. 이 회사에 조셉 콘래드는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죽은 덴마크인 선장 프레슬레벤의 후임으로 파견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알렉상드르 델코뮌의 원정대에 참여해 기선 '플로리다' 호를 몰기로 계약했다. || [[파일:VingtAnnees_286.jpg|width=30%]] || || 콘래드가 탔던 15톤급 화륜선 '루아 데 벨지'호의 사진. 천변에 정박 중이어서 얼핏 보면 수풀 위에 세워진 초소처럼 보인다. 1889년 알렉상드르 델코뮌이 촬영했다. || 하지만 막상 킨샤사 교역소에 도착하니, 그곳 소장이자 알렉상드르의 동생인 카미유 델코뮌은 콘래드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배를 내어주지 않았다. 대신 델코뮌은 콘래드를 루드비그 라스무스 코흐가 모는 15톤급 화륜선 '루아 데 벨지'[* 벨기에의 왕이라는 뜻. 당연히 당시 왕 [[레오폴드 2세]]를 의미한다.] 호의 선장 보조로 참여시켜 상류 교역소로 이동했다. 프레슬레벤이 죽고 콘래드가 도착할 때까지 콩고 강을 항해하는 기선들의 고장이 속출하여 상류와의 연락이 거의 끊어진 상태여서, 하루빨리 상황을 알아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정 도중 콘래드는 아프리카 식민 사업이 레오폴드 왕의 호언장담이나 벨기에 사회에서 도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지인을 위한 계몽과 진보는커녕, 유럽인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착취와 학대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 이 점 때문에 그는 다른 선원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콘래드는 흑인들에 대한 인도적 계몽이라는 이상을 위해 여정에 참여한 것이었지, 그들처럼 계몽을 가장해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콘래드의 인종주의적 시각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콘래드는 제국주의자들이 계몽을 가장해 온갖 착취와 노예화를 일삼으며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비판했지만, 그 문명화와 계몽이라는 이상 또한 식민지인들을 한 단계 낮춰보는 시각에서 나왔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 정책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정책에 비해 더 '이상'에 가까운 긍정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다. 실제로는 영국 또한 아일랜드나 인도 등지에서 수많은 탄압을 자행했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건 현대에 와서 보면 그러하므로 어느 정도 걸러 봐야 한다는 소리고, 당대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유색인종 인식에 비하자면 콘래드의 시각이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한편 다른 동료들은 시종일관 뻣뻣하게 굴며 자신들과 거리를 두는 콘래드의 모습을 보고 혹시 그가 회사 상부에서 감시를 위해 내려보낸 인물이 아닌지 의심했고, 그의 보고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를 뺏길까 우려했다. 당시 아프리카 교역소 근무는 잘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풍토병]]을 버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자리를 놓지 않으려 했다. 대부분이 벨기에 출신이었던 그들[* 코흐 선장 제외. 그는 프레슬레벤처럼 [[덴마크인]]이었다.]과 달리, 콘래드는 동유럽 귀족 출신의 영국인이라는 완전한 이질 분자였다는 점도 그들의 의심과 적대감을 부채질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코흐 선장은 콘래드에게 선장직을 뺏길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좀체 배를 몰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코흐는 여정 도중 병으로 앓아눕고 말았고, 콘래드는 그가 회복될 때까지 대신 배를 몰 수 있었다. 그들은 최종 목적지에서 돌아오면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교역상 클랭을 데리고 오지만 그는 도중에 죽었고, 얼마 안 있어 콘래드 역시 풍토병에 걸려 앓아누워 킨샤사로 이송된다. 병이 어느 정도 치료된 후,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된 식민지 개척의 진상을 볼 만큼 본 콘래드는 만기일을 6개월 남겨두고 선장 계약을 파기하고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96년과 1899년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해서 두 소설을 쓰는데 그것이 '진보의 전초 기지'와 '어둠의 심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